수은주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지난 14일 아침 8시. 민통선 이북의 강원 철원군 양지리 토교저수지에서는 두루미 수백마리가 얼음 위에 엎드려 웅크린 채 잠자고 있었다. 칼바람 소리가 저수지를 휘감았다. 해가 뜬 직후여서 서서히 몸을 움직여보는 두루미가 있었고, 먹이 활동을 하러 날아가는 새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자던 모습 그대로였다. 알려진 것처럼 외다리로 자는 게 아니었다.
1990년대부터 ‘두루미 지킴이’ 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어온 주민 심상국씨는 “두루미들이 한쪽 다리를 감추고 외다리로 서서 자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오래 지켜보니 아주 추울 때는 웅크리고 얼음 위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너무 춥다보니 고고한 학 같은 모습을 버리고 얼음에 엎드려 서로의 체온으로 한밤 추위를 이겨낸다는 것이다. 심씨는 “덩치 큰 두루미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모여 잠을 자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함께 두루미 서식지를 둘러본 국립생물자원관 강승구 박사는 “오랫동안 지켜본 주민들이 전문가들도 모르는 두루미 습성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두루미 관찰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두루미들이 놀라지 않도록 멀리 1~2㎞ 이상 떨어진 곳에서 망원경으로 이뤄졌다. 심씨는 “주민들도 수백마리의 두루미가 한데 모여 잠자는 걸 보는 일은 드물다”며 “오늘은 운이 아주 좋은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 외다리로 서서 자는 두루미도 겨울 밤 칼바람 앞에서는
그 고고함을 버리고 웅크린다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은 국내 최대의 두루미 도래지다. 휴전선과 가까워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덕분에 두루미가 좋아하는 습지가 잘 보전된 곳이 많고, 먹이가 될 만한 것들도 여기저기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천 횡산리에서는 13일 오후 도로를 따라 둘러본 율무밭마다 두세 마리씩 두루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두루미 서식지를 함께 둘러본 한탄강지키기운동본부 이석우 대표는 “율무는 수확 후 밭에 남아 있는 비율이 다른 곡식보다 높은 편이어서 두루미에게 좋은 겨울철 먹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로 주변 밭에는 고라니들도 멀뚱히 서서 지나가는 취재차량을 지켜봤고, 하늘에는 독수리·말똥가리 같은 맹금류들이 날아다녔다.
철원·연천의 두루미 서식지는 조류인플루엔자(AI)로부터도 안전한 청정지역에 가깝다. 이석우 대표는 “민통선 안쪽은 다행히 사람들 출입이 적고, 다른 철새도 별로 없어서 조류인플루엔자 관련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만 청정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주민들과 조류 전문가들은 전국적으로 번지는 고병원성 AI 발생으로 인해 철새를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걱정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AI 확산 원인을 섣불리 겨울철새인 가창오리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농민들이 수확 후에 철새가 찾아오지 않도록 논밭에서 먹잇감이 될 만한 볏짚이나 낙곡을 모두 치워버리게 될 수도 있다.
애초 가졌던 기대와 달리 연천에서는 수십, 수백마리의 두루미가 날아다니는 장관이나 한데 모여 먹이활동을 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유를 묻자 이 대표는 “최근 수자원공사가 임진강 하류 군남댐의 물을 담수하면서 물이 깊어지고 여울이 얼어붙어 두루미들이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살이 빨라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던 수심 20~30㎝의 장군여울이 수심이 깊어지면서 여울로서 기능을 못하자 두루미들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실제 얼어붙은 장군여울에는 두루미가 한 마리도 안 보였지만, 상류 쪽으로 1㎞도 떨어져 있지 않은 빙애여울에는 두루미들이 군데군데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수자원공사가 가능한 한 빨리 두루미들을 위해서라도 아무 이유 없는 담수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 수십, 수백마리가 날아가는 장관은 볼 수가 없었다.
임진강 하류 댐 담수로 강물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담수 외에도 인간의 활동은 여러 방식으로 두루미에게 위협이 된다. 두세 마리, 또는 십수마리씩 날아다니는 다른 두루미들과 달리 혼자 하늘을 날아다니다 밭에 내려앉은 두루미가 눈에 띄었다. 이 대표는 “배우자를 잃은 두루미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전선에 부딪혀 날개를 다친 두루미를 구조했는데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아마 그 배우자인 두루미가 짝을 잃은지도 모르고 찾아 헤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말처럼 두루미는 일부일처로 평생을 해로하는 대표적인 조류다. 짝을 잃으면 다른 짝을 찾기는 하지만 사고가 없는 한 평생을 첫 배우자와 함께 산다.
현재 철원에서는 농민들이 수익용 작물을 재배하는 하우스를 늘리면서 자연 그대로의 논밭이 줄어 두루미 먹이도 감소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식량 부족을 겪는 주민들이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에 두루미의 먹잇감을 남겨놓지 않는 바람에 배고픈 두루미들이 ‘탈북’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철원 지역에서 급속도로 증가한 두루미들이 함경남도 안변에서 넘어온 두루미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태가 아름다워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사진애호가들의 표적이 되는 것도 두루미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 대표는 “일부 몰상식한 이들은 두루미가 날아가는 모습을 찍으려고 멀쩡히 먹이활동 중인 두루미 근처에서 소리를 질러 두루미들을 놀라게 한다”고 말했다.
생물자원관 강 박사와 함께 이틀간 두루미와 재두루미의 개체수를 세어봤다. 14일 연천에서는 두루미 113마리, 재두루미 103마리가 확인됐다. 15일 철원에서는 두루미 179마리, 재두루미 615마리가 파악됐다. 새들은 빠른 속도로 멀리 이동할 수 있어 한 지역에서만 모니터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매년 1월 동시 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생물자원관은 올해도 지난 24~26일 국내 180여곳에서 새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특히 올해는 AI로 인해 철새 개체 수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실시했다.
한국을 찾는 두루미는 6종이다. 개체수가 많은 두루미·재두루미·흑두루미 중에 몸집이 가장 큰 것은 138~152㎝에 달하는 두루미다. 학이나 단정학이라 불리며 머리에 붉게 살이 드러나 있는 게 두루미다. 재두루미는 두루미보다는 조금 작은 120~150㎝ 정도이며 91~100㎝ 크기의 흑두루미가 가장 작다.
흔히 ‘학(鶴)’으로 불리는 두루미 외에도 한국에는 두루미와 비슷한 외양의 새들이 여러 종 서식하고 있다. 황새·백로·왜가리가 대표적이다. 이 중에 몸길이가 두루미 다음으로 크고, 겉모습도 비슷한 황새는 학이라고 잘못 불리는 경우가 가장 많다.
전국 곳곳에 살고 있는 왜가리와 백로는 여름철새인 탓에 겨울철새인 두루미와 같은 시기에 볼 일이 없었지만, 일부가 국내에서 월동하면서 텃새화돼 역시 학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두루미와 다른 새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몸길이다. 두루미는 몸길이가 1.4m가량이며 편 날개의 길이는 2.4m에 달한다. 황새는 몸길이가 1m, 왜가리는 97㎝가량이고 백로 중에 중대백로는 87㎝ 정도, 쇠백로·황로·해오라기는 55~65㎝ 사이다. 유심히 보면 크기만으로도 두루미를 구분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황새는 몸 빛깔이 두루미와 가장 비슷하나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다. 두루미는 주로 습지와 밭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 습지 주변의 물이나 땅 위에 마른 갈대나 풀줄기를 이용해 둥지를 만든다. 학처럼 보이는 새가 높은 나무 위에 있다면 두루미가 아닌 황새라고 생각하면 된다.
백로와 왜가리 역시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든다. 백로류 중 중대백로·중백로·쇠백로·노랑부리백로 등 4종은 몸 빛깔이 하얗고, 왜가리는 회색 빛깔이다. 국립환경과학원 자료를 보면 일반적으로 왜가리와 중대백로는 6~10m 이상의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쇠백로·황로·중백로는 이보다 낮은 나무에 둥지를 만든다. 해오라기는 3.7~9.7m 사이 다양한 높이에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