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로 벼이삭이 검게 썩어들어가는 냉해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8일 오후 경기 여주군 가남면 본두2리에서 한 농부가 벼를 거둬들이고 있다. 여주/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비가 아니라 고문이에요, 물고문 말이에요 ….”
8일 오전 경기 연천군 백학면 전동리 들녘. 추석을 사흘 앞둔 때인데도 황금빛은 찾아볼 수 없다. 푸른 빛을 띠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 빼곡이 서 있는 벼들 사이로 곳곳에 시커멓게 썩어들어간 벼 이삭이 보인다.
논에서 살균제를 뿌리던 최승덕(42)씨는 “예년 같으면 추석과 벼 수확을 앞두고 들뜬 마음에 젖어 있었지만, 올해는 풍작은커녕 서리마저 일찍 내려 논을 갈아엎어야 하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다”고 말했다.
결실의 계절이지만,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온나라의 농촌이 쉬지 않고 내리는 잦은 비로 유례없는 흉작이 기정 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추석을 코 앞에 두고도, 사정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전남 나주 남평들녘도 잦은 비로 벼가 군데군데 누워있었다. 이곳에서 벼농사를 짓는 송병선(68)씨는 이날 “10여년 흉년이 없었는데, 올해는 비 때문에 병충해가 극성을 부린데다, 일조량 부족으로 이삭이 제대로 여물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지역 농민들은 한결같이 올해 벼 수확량이 적어도 예년의 10~15%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운산리 송대마을에 사는 이공선(37)씨의 처지는 더 참담했다. 이씨는 “올해 8천평에 조생종을 심었는데 수확 가능량은 10% 수준으로, 논을 그냥 갈아엎어야겠다”며 “600만원을 대출받아 농사를 지었는데 어찌해야 하느냐”며 말을 잊지 못했다.
특히 유례없는 흉년이 예고되면서 소작농들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 이장 정순완(56)씨는 “소작농이 마을 인구의 절반이 넘는데, 흉작이 들면 농협에서 빚을 얻어 논 1천~2천평을 짓는 소작농들의 피해가 크다”며 “대부분 60살 이상 노인들로 자식들 맞을 추석이 코앞인데도 좀처럼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경북 안동시 길안면 천지1리에서 1만여평에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권영묵(54)씨는 “하늘이 원망스럽다”며 “과수농가의 경우 수확이 워낙 나쁘지만, 대신 값이 올라 아직은 손익을 점치기 어렵지만, 흉년에 인심 들기는 어려운 법 아니냐“며 “올 한가위는 영 한가위 같지 않다”고 말했다.
농업기술원 조사 결과, 최근 추수가 시작된 조생종이 제곱미터당 벼알 수가 3만7375알로 지난해보다 846알, 평년보다 606알 가량 줄었다. 또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갈 중·만생종 벼는 흐린 날씨가 지속되면 10%까지 수확량이 줄 것으로 예상된다. 농촌진흥청도 올해 쌀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최소 5% 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3422만섬보다 171만섬이 줄어든 것이다. 농촌진흥청 식량작물과 박종욱 연구원은 “이런 추세라면 전년도보다 5% 정도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며 “9~10월의 기상 여건이 앞으로 벼농사에 최대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달에도 비가 잦으면 더 큰 흉작이 우려된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하지만 기상청은 8일 발표한 월간예보에서 “이달 중순과 하순에도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겠다”고 예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