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배, 병포도, 오투(O₂)오이, 율무느타리버섯….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이 가는 아이디어 농산물들이다. 병배와 병포도는 투명한 유리병 속에 과실을 넣어 길렀고, 산소오이는 비닐 봉지를 이용해 저농약으로 재배했다. 율무느타리버섯은 처치곤란이던 율무의 대를 이용해 버섯의 품질을 높인 경우다.
농가(農家)에 높은 소득을 가져다 주고 있는 이들 제품은 대학 연구소나 유명한 발명가에 의해 개발된 것들이 아니다. 작은 농업기술센터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 냈다.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면 우리 농민들은 지금보다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연천군농업기술센터의 이상호(李相鎬·51) 소장은 가격경쟁에서 불리한 우리농산물이 특화(特化)를 통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근무인원이 29명에 불과한 연천군농업기술센터가 현재까지 출현한 특허(特許)는 자그마치 10건. 그중에서 병배와 병포도는 이미 도시민(都市民)들에게 인기다.
농업기술센터가 아이디어 농산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논의가 본격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연천지역은 과수재배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농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었다.
“마을에서 웃음이 사라졌죠. 농민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26년째 근무중인 신동준(申東峻·46)씨는 새로운 농산물을 개발하기 위해 당시 매일 아이디어 회의를 열었다고 말했다.
신씨를 포함한 5명의 원예기술개발팀 연구원들은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다’는 생각에 1993년부터 병배의 시험재배에 들어갔다. 배를 병 속에 넣는 것은 쉽게 성공했지만 변색(變色)이 문제였다. 소주나 알코올을 넣어 보았지만, 보존기간에 한계가 있었다.
3년에 걸쳐 1000개가 넘는 배를 시험한 끝에 인체에 무해한 산화방지제를 첨가한 술을 이용해 변색을 막는 데 성공했다. 1999년 3월에 특허등록을 마친 병배는 올해 1만개가 생산돼, 1개당 3만5000원에 팔리고 있다. 신씨는 “병배를 개발하는 과정이 마치 산모(産母)가 아이를 낳는 것만큼 힘들었다”며 “하지만 자식같은 병배가 농가소득에 한몫을 해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후 이 지역 농민들은 농업기술센터가 개발한 병포도와 오투(O₂)오이를 생산하며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다. 병배를 5년째 생산하고 있는 농민 오명춘(41·吳明春)씨는 “같은 배가 예쁜 옷을 입더니 서너배가 넘는 수입을 가져다 주고 있다”며 “아이디어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과도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농업기술센터는 이런 연구실적으로 2000년에는 새해영농설계교육 우수기관상, 2001년 농업연구 대상을 수상하고, 작년엔 농촌진흥사업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 소장은 “자유로운 연구분위기를 위해 직원 정례회의를 없애는 대신 수시로 아이디어 회를 열고 있다”며 “모든 직원들이 한가지 이상 아이템을 선정해 연구를 하고 발표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농업기술센터는 요즘 가시가 적은 두릅나무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이 소장은 “새로운 두릅나무가 탄생하면 농민들의 일손이 한결 줄어들 것”이라며 “농민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은 결국 아이디어 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