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을 다 누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뉴잉글랜드 지방의 날씨는 우리 조국 고향의 사계절과 흡사하다. 꽃피는 봄이 있고, 싱그러운 여름이 있고, 온 대지 위의 생명들에게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있다. 그리고 하얀 눈이 내리는 긴 겨울이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만, 겨울이 길어 노인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지루할 때가 있기에 좀 아쉽기는 한 일이다. 또한 오가는 운전길이 염려스럽기에 겨울이 조금만 짧았더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이다.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가는 RT 95 N와 RT 495 N를 타고 가다보면 굳이 단풍구경을 가지 않더라도 물들여진 나무들의 울긋불긋한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이 가을날을 보며 신에게 감사하지 않은 이가 또 어디 있으랴.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들을 만들어 놓으신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까. 빨갛고 노랗고 푸른 초록의 단풍잎들의 조화는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밝은 기운으로 환한 웃음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풍성한 기운으로 열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노인들에게는 겸손함과 풍요로움으로 더 없는 축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초록의 잎들이 하나 둘 제 모습을 찾아 물들여 가고 있는 것이다. 초록 잎으로 있을 때는 그 어느 누구도 무슨 색깔로 물들여 지는지를 알 수가 없다. 가을이 깊어가고 제 색의 옷을 다 갈아입을 때 즈음하여 제 색깔을 알아 가는 것이다. 어찌 이리도 우리의 삶과 비슷할까? 우리의 삶 역시도 젊어서는 모두가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각자의 길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어떤 이는 성실하게, 또한 어떤 이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이도 있는 것이다. 불혹(不惑)의 언덕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면 조금씩 각자의 색깔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순(耳順)을 넘고 고희(古稀)가 되어가며 돌아갈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나뭇잎들도 물들여지고 제 모습을 맘껏 자랑하다가 제 몫을 다하면 돌아 갈 때를 아는가보다. 가을 바람이 불고 가을 비 내리면 어느덧 땅의 색으로 다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제 무게만큼만 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제 길 위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숭고한 모습일까? 우리의 인생도 아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돌아 갈 자리를 알아 가는 지극히 겸손하고 맑은 영혼을 찾아 나서는 삶이면 좋을 것이다. 젊은 날의 열정도, 꿈도, 희망도 울긋불긋 물들이던 단풍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리라. 그리고 가을비가 내리고 가을 바람이 불어옴을 알아 가는 맑은 마음으로 만나 가는 삶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가벼워질 수 있는 그런 여유의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 갈 자리를 마련 해 놓고 땅의 색깔을 찾아 내 색을 변화시켜 가는 그런 풍요로운 삶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 낙엽이 화려한 옷들을 벗어 놓으며, 제 돌아갈 옷으로 갈아입는 낙엽이 되는 것처럼 제 무게만큼만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의 갈무리면 좋겠다. 내 몸을 떨구어 대지 위에 쌓이고 하늘이 내려주는 비 맞아 흙과 함께 섞여 새 생명을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이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하지만, 어찌 그리 쉬운 일일까? 어쩌면 젊어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에서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의 욕심들, 누렸던 즐거움들 그리고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과 물건들을 어찌 쉽게 놓을 수 있을까?
이 가을 날 단풍이 하나 둘 물들어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머지않아 비바람 불면 하나 둘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져 날릴 것이다. 제 무게만큼만 날리어 그렇게 제 길 위에 누울 것이다. 화려했던 단풍잎들을, 하나 둘씩 그렇게 떨구며 제 갈 길 위에 겸손함으로 맞이하는 자연을 보며 생명의 신비로움을 또 만나게 된다. 제 몸을 떨구어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준비하는 저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겸허한 마음이 인다. 그래, 저렇듯 내려놓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미리 준비하는 삶이길 마음을 모아보는 날이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 속에서 질서 정연한 자연의 섭리 앞에 숙연함을 만난다. 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놓으신 창조주의 손길 위에 신비로움과 감사가 있는 날이다. 자연과 우리 모두에게 더 없는 축복을 주심에 숨쉬고 호흡하는 모든 생명들이 얼마나 감사인지를 깨닫는 날이다.
나의 무게만큼만 바람에 날릴 수 있기를,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할 수 있기를, 그런 귀한 깊은 영혼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모아보면서...
